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인 전투 (문단 편집) === [[불멸의 이순신]] === [[불멸의 이순신]]에서 묘사된 용인 전투. 조선군의 숫자는 5만으로 설정되었다. 광주 목사 권율이 육군력이 강한 왜군에게 단병접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며 5만 군사를 5천으로 10개 부대를 나눠 운용하자고 이광을 설득하지만 이광은 그런 거 없다며 [[우라돌격]]을 시키고, 그 결과 왜군의 유인책에 밀려 허망하게 대패하고 만다. > 임진년 6월 5일부터 6일 양일 간, 도성 수복을 위해 결진했던 조선 하삼도 연합군과,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용인 전투는 '''조선군의 철저한 패전으로 허망하게 끝이 났다.''' > 광주 목사 [[권율]]. 그도 이 날의 패전지장이었다. 그러나 권율은 이후, [[이치 전투]]에서 [[행주 대첩]]까지 승첩을 이어가 도성 탈환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니, 그가 이 날의 전투를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. > > 용인 전투, 그 패전이 군왕 선조와 조정에 던진 파장 또한 컸다. > 이미 경기, 황해, 평안 삼도 군사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진데 이어, 마지막으로 믿었던 전라, 충청, 경상 삼도의 도성 탈환마저 무위로 끝나버렸으니, 육지로 진격하여 이미 평양성 앞까지 와 있는 일본군을 막을 수 있는 병력을 대부분 잃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